원아이드잭 [521447] · MS 2014 · 쪽지

2018-07-04 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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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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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사람.


2001년 어느 증권회사 광고의 카피라이터입니다. 


당시 이 광고는 무의식적으로 다수의 의견에 동조하며 살던 당시의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광고에서 모두의 ‘예’를 여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론이란 ‘특정 사안에 대해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견해’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원전폐기정책에 대하여, 

경찰의 수사권 독립에 대하여,

최저임금인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리고 남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던가요.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여론이 갖는 힘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합니다. 여론은 민주주의의 주요한 의사결정방식인 다수결과 결합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여론은 중요쟁점에 대해 민주적 숙의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집단적 지성의 창출수단 혹은 매개체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여론은 결국 투표로 이어져 기존 정권을 유지시키거나 새로운 정권을 창출합니다. 때문에 정당들은 항상 여론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수의 힘에 의해 긍정적 결과를 도출해낸 여러 차례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군부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루어낸 경험, 

2002 한일 월드컵의 거리응원, 

그리고 최근의 촛불혁명까지.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여론에 대하여 너무나도 관대하고, 

여론을 한없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론은 집단지성을 신봉하는 자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것과 달리 항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첫째, 여론은 그 개념적 정의와 달리 ‘다수의 의견’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여론은 민주적 정당성의 근거가 되기에 자신들의 행위에 민주적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특정집단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드루킹 사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정집단이 여론이라고 규정한 것을 우리는 여론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앞서 제가 물어보았던 원전폐기정책, 수사권독립, 최저임금인상에 관하여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견해가 과연 순수한 여러분의 견해인가요. 


둘째, 여론은 지나치게 감정적입니다.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가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행동을 고발하는 글을 쓰면, 이를 보고 분노한 네티즌들이 사건의 진위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마녀사냥’을 하고, 후에 이것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의 일방적 주장이었거나 피해자라고 주장했던 이가 오히려 가해자였던 경우를 심심찮게 경험했습니다. 다수가 냉정을 찾은 이후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는 다수의 힘으로 자행된 집단적 원한감정의 해소과정이었기에 다수에 속했던 개인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며 책임을 면하곤 했습니다. 

특정인에 대한 구속영장청구가 기각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인터넷 뉴스 댓글을 확인해보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사를 구속시켜야 한다.’, ‘사법부가 한통속이다.’등의 지나치게 감정적인 댓글들이 종종 보입니다.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나, 우리 형사소송법에서는 불구속수사를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과연 구속수사를 해야 할 만한 예외적 상황인가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구속사유가 없으면 구속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논리대로 다수가 분개할만한 사건을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구속시켜버린다고 하면 이것은 오랜 기간을 통해 확립한 법치주의의 전통을 버리고 고전적, 다수의 민중이 원하는 바대로 정치체계를 재편해버리는 원시적 형태의 도편추방제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셋째, 여론은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기에 잘못된 결정을 내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답이 있는 문제에 대해서 답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다수결에 의한 판단을 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자주 사용되는 너무나도 멋진 ‘집단지성’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여론’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앞서 살펴본 구속수사의 사례를 다시 가져와 본다면, 뉴스에 의해서 피상적인 정보의 일부분만을 전달받아서 사건을 대충 알고 있는 대중들이 내린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이 과연 다년간의 법조경력을 바탕으로 범죄소명자료와 피의자에 대한 심문을 통해 판단을 내린 판사의 판단보다 더 정확한 것일까요. 


저는 방송인 A씨를 싫어합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은 말을 하면 그들로부터 큰 박수와 지지를 받으며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음을 경험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그전까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던 그에게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그에게는 꽤나 짜릿한 경험이었나 봅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계속 방송을 통해 실속 없고 알맹이는 없지만 멋있어 보이는 이야기, 듣는 이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듣는 이들의 입장 혹은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하며 대중적 수요에 영합해왔고, 자신을 현대사회에서의 ‘오피니언 리더’로 잘 포장시켰습니다. 저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뻔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이의 모습에 할 말을 잃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다수에 대한 동조와 편승을 통한 여론의 확대 및 재생산은 사회적 효용성이 크지 않아 보입니다. 욕을 먹더라도 다수가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해야 특정 쟁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고 토론을 통해 더 발전적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송인 A씨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꽤 길게 이어졌지만, 저는 이것이 비단 A씨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비판할 때에 자신 또한 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저 또한 A씨일 수 있고, 여러분도 A씨가 될 수 있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여론이 갖는 커다란 힘에 대해서 다시 서술하는 것은 글의 피로도를 높일 수 있기에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만한 이론을 하나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침묵의 나선’이론입니다. 


‘침묵의 나선이론’이란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이 다수의 의견과 동일하면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소수의 의견일 경우에는 남에게 나쁜 평가를 받거나 고립되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여론의 형성 과정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 모습이 마치 나선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주류에 속하고 싶은 인간의 강한 욕망이 침묵의 나선을 만든다고 합니다.


우리사회는 다수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지를 않기를 요구하는 ‘눈치사회’라고 할 수 있기에 이 이론은 우리사회에 아주 잘 부합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다수의 선호와는 다른 자신의 선호를 다수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포기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다수의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함에도 정신적 고독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을 닫은 경험도 있을 것이고요.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을 알고 있나요. 단일한 감자종을 통해 아일랜드의 식량난을 해결하려했지만, 그 감자종의 병충해는 아일랜드를 죽음의 땅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여론이라고 하는 단일한 감자종에 대한 추구는 우리사회를 여론으로 규정된 견해만이 확대, 재생산되고,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집단 지성’ 그리고 ‘여론’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멋있기만 한가요.


여론의 부정적 측면을 발견했을 때, 

여러분은 예전처럼 다시 침묵할까요. 

아니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P.S


여론이 갖는 긍정적 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 측면도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여론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탐구가 극단적인 엘리트주의적 사고관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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