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g [17576] · MS 2017 · 쪽지

2006-12-09 18:05:46
조회수 6,696

삶은 이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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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자. 과연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일류 명문대에 입학할 만한 성적을 내었던가.
앞선 해의 선배들은 만점자가 수십 명이 나올 정도로 너무 쉬운 시험에 큰 낭패를 보았다는데,
그럼에도 내 고3 시절 내내 모의고사는 다소 쉽게 출제되었다.
그런 중에 수학문제 풀기가 너무도 싫었던 나의 40점대 수리영역 점수는 어찌나 민망했던지.
달이 갈수록 다들 늘어가는데, 나는 고집스럽게도 40점대를 지켜냈다.
그래도 교내 상위권에 발 한쪽 딛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어지간했던 언어영역 점수 때문이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다음 날 신문에 점수가 폭락했단 기사들만이 가득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운이 참 좋았다. 나는 마지막 모의고사 때보다 조금 오른 53점의 수리영역 점수를 받았다.
언어영역은 만점에 가까웠던 마지막 모의고사보다 16점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운이 좋았다.
그래서 난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고대와 연대, 그리고 성대를 고민하는 운 좋은 녀석이 됐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상담을 위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배치표를 펼쳐놓고, 점수표 중에서 내 점수에 동그라미 쳐놓고, 가로로 줄 하나 그으면 그만이었다.
가군의 성균관대 사회과학계열, 혹시나 하는 걱정에 나군과 다군 발표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내 관심은 사회과학이었고, 고대와 연대를 고민하려면 내 점수는 상향 크리크 조정이 필요했다.
입학을 위한 절차들을 밟고, 3월 2일 처음으로 대학 강의실에 들어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7월 말, 월드컵이 끝났고 내 손엔 평점 0.23이라는 경이로운 성적표가 들려있었다.
하긴, 4월 중순 이후로는 안국역행 3호선 승차권보다 축구대표팀 경기 입장권을 더 많이 샀다.
그때 쯤이었다. 반수를 생각하고, 올비를 찾게 된 것.
휴학생 신분으로 2003학년도, 2004학년도 수능을 연속해서 보면서 내 점수는 꾸준히 올랐다.
입시학원마다 내놓는 수치가 다르긴 했지만, 예상 석차도 더 좋아졌다.
다만 그뿐, 2002학번의 내 학생증은 그대로였다.

2004학년도 수능을 치르고 난 후 꽤 힘들어했다.
올비 때문이었을까, 내 영점사격 표적지엔 탄착군이 너무 높게 형성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이런 녀석들\'이 존재하는지 꿈에도 몰랐던 게지. 난 데 없는 승부욕.
난 더이상 운 좋은 녀석이 아니었다.
무얼 그토록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욕심만큼 매달리고 발버둥 치는 그저 그런 삼수생.


2004학년도 1학기 복학신청을 하면서 안타깝게도(?) 방어율 0.23의 데뷔기록은 지워야했다.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시작. 그리고 날마다 벨을 누르던 매일 새로운 얼굴의 빚쟁이들.
과외를 시작했다. 어찌됐건 지난 3년 간 꾸준히 수능 공부를 해온 나였다.
세번 째 수능을 준비하면서는 후회를 남기지 않겠노라고 꽤나 열심이었는데,
그때 언어영역 공부에 대해 꽤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無限流가 알려졌다.
쉽지 않았다. 돈에 쫓기며, 돈을 버는 일.
한달에 20시간, 학생에게 그리 힘들지 않게 문제풀이를 해준 것만으로
나와 내 가족에게 그토록 절실했던 얼마를 받을 수 있단 그 계산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어려운 시기엔 버스에서 내리며 내 주머니에 5만원을 슬쩍 넣어주는 친구가 있었고,
투정 같은 내 하소연 다 들어가며 내 손 잡아준 여자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고 과외를 하면서, 연애까지 잘 하는 건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었다.

꽤 절실했던 모양이다.
휴학을 하고 도를 넘어선 집착 같은 수험 생활을 하다 실패한 끝에 나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가뜩이나 학창시절부터 애늙은이 같단 소리를 들어왔는데, 인생경험을 하다보니 철도 좀 들었다.
내 바람 따라 세번 째 수능은 후회를 남기지 않았고, 학교엔 정이 들어갔다.
목표가 생겼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강박증 같은, 이유도 있었다.
복학 후 여섯학기를 다니는 동안, 내가 낸 등록금은 500만원을 넘지 않는다.
(성균관대는 동학년 학부/학과 수석에게도 70% 장학금을 지급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심한 심적 압박에 휘둘리지 않았던 건, 공부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전공진입 첫 학기, 아웃사이더 생활을 하던 나를 같은 과 사람들은 \"외교관 아들\"이라고 불렀다.
훗날 친해지고 나서 설명을 들어보니,
외교관 아버지에게 특별 과외를 받지 않고는 어떻게 그런 토론을 할 수 있겠나 싶었단다.
언어영역과 논술 과외를 하면서 논리적 사고에 대한 공부를 했던 건 분명 큰 도움이 됐다.
이 곳 학습게시판에 언어영역 기출문제 분석에 관한 글을 올렸을 때,
독창적인 접근이라는 평가를 받게 했던 그 특이한 아이디어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게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동안 죽을 것 같던 날들이 지나니
그동안 내 삶이 고단하여 힘들다고 손 뻗어보지 않았던 내 사람들이 곁에 있음이 보였다.
실연은, 내가 무엇이 부족했던가 되짚어 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후로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오늘에 돌이켜보니 그러하다.


난 운이 좋았다.
그리고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
내가 만들지 않은 상황이 날 얽매자
그저 그것으로부터만 벗어나길 바랬다.

나는 무엇을 하고자 했고,
무엇을 얻고자 했고,
무얼 손에 쥐게 되었을까.


난 지금,
다음 학기를 마지막으로 7학기 조기 졸업을 앞두고 있고,
학석사 연계 과정으로 현재 학부 강의와 대학원 강의를 병행 수강 중이며,
졸업 후 3학기 간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게 된다.


어느날 내가 나를 바라보니, 삶은 이렇구나 하였다.
사춘기에 철 들었다던 어머니 그 말씀이 아니라,
이제사 내가 나를 보니, 내 삶을 사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어느 삶이 아니라, 내 삶이 이러하니 나는 이렇게 사는구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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