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사람 [368351] · 쪽지

2011-02-07 19: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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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렇게 하면 필승한다.

게시글 주소: https://mission.orbi.kr/0001134449

출처:www.gongsin.com

오르비분들도 보고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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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년 전의 약속을 드디어 이루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되니 감회가 정말 새롭네요.

우선 간단한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자기소개

저는 현재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09학번인 구본석이라고 합니다. 공신으로도 활약하고 있구요.

올해 09입시에서는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가군:대전대학교 한의예과(최초합)

나군: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최초합)

특목대:경찰대학교(최초합)

육군사관학교(최초합)



저를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은 전 삼수해서 이 자리에 와 있거든요.

전 삼수를 시작하기 전에 공신에 글을 하나 올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자극충전100%-이렇게 하면 필패한다"



고등학교 시절

이 글에서도 보시면 알겠지만 전 고등학교 3년내내 전교1등을 뺏기지 않은 ㅚ수같은 존재였습니다.

저는 그 자체로 전설같은 존재였고 신화적 인물이었습니다.

저희 학교는 신설학교(제가 7회졸업생이에요)였는데 거기에 처음부터 남으셨던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자기가 지금까지 교직생활해보면서 저보다 열심히 공부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노력하나만큼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자신있었습니다.

야자끝나고 집에 와서 잘 때면 밤11시. 새벽 1시에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 부탁해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1시부터 잠깨고 씻고 하면 대략 1시 반.1시 반 에서 6시 반 까지 5시간 동안 남들이 자는 그 시간에

저는 저만의 공부시간을 가졌습니다. 언어, 수리 ,외국어 개념공부를 한 번씩 쭉 돌리고 부족한 부분은 인강도

들었습니다. 6시 반에서 6시 45분까지 아침을 먹고 7시까지 학교에 도착하였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면 조금 졸렸어요.그래서 대략 15~30분 정도 잠깐 자고 아침 영어듣기 하고

0교시에 새벽에 공부했던 것을 쭉 정리했습니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까지 단 한번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저보고는 화장실도 안가냐고 놀려댔습니다.

네. 전 화장실도 안갔습니다. 생체리듬을 그렇게 맞추어 놓았어요.

아무리 급해도 절대 안간다라는 식으로요.진짜 가고 싶으면 수업시작하기 바로 전 아이들이 산만할때

재빨리 다녀왔습니다.

점심시간 되기 직전 저는 여느 아이들처럼 재빨리 점심먹으려고 재빨리 준비했습니다.

그러면 첫번째나 두번째 정도로 밥을 탑니다.밥은 반찬별로 골라서 먹는 게 아니라 한 곳에 모아서

밥,국 반찬 모두를 다 비벼서 먹었습니다. 어떠한 반찬들이라도...

왜냐면 저에게 주어진 점심시간은 15분이었거든요(제 자신과의 약속 말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친구들은 제가 걸신들렸냐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였어요.그 15분은 양치까지 합해서 15분이었어요.밥먹으면 곧바로 달려가 양치까지 마쳤습니다.

그리고서는 학습실(상위권을 위한 자습실) 문을 열고 사탐 한 과목을 공부하였습니다.

점심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오후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녁시간도 마찬가지였고 역시 저녁먹고서 사탐 다른 한 과목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서 7시부터 시작되어 11시까지 이어지는(전10시 반까지요 집에서 잠자려고) 야자시간.

저는 그 야자시간 동안 하루동안 이미 개념공부를 했던 것을 머리 속에 완벽히 체화시키는 트레이닝을 하고

문제를 풀었습니다.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07수능 저능 수능을 상당히 잘 본 편이었습니다. 대전에서 3~5등권이었으니까요.

그리고서 서울대 법대 1차 합격이라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논술공부를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저는 서울대 2차 논술,면접시험에서

완전 발렸습니다. ㅠㅠ

그래서 저는 재수를 결심했습니다. 서울대 법대 아니면 차라리 죽는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중3

중3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저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불량아였습니다.

피시방을 전전하고 오락실을 집 드나드는 것처럼 다녔습니다.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면 망을 봐주는 따까리같은 존재였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께 덤비고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과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저희 어머니는 저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엄마의 품 속에서 배운 한자는 저의 기억 속에 맴돌아 엄마 품에 안기는 심정으로 한자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점점 비뚤어지고 외로워질수록 저는 한자 공부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3때 한문 사범 최연소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매우 약해 어머니께서 있는 돈 없는 돈

다들여 검도를 시키셨습니다. 역시 같은 이유로 검도도 꾸준히 하여 검도 4단자격증도 취득하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패러독스같은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셔서 가정형편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원래 가사일을 하시던 분이시라 저희 집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 치달았습니다.

저는 여동생을 둔 장남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 어머니의 눈물을 본 순간 저는 그 날 하루종일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저는 완전 부모님 등골을 쪽쪽 빼먹는 개망나니같은 존재였었거든요.

그 다음날 제 이웃이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소송했다가 오히려 패소하는 억울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날 티비에서는 [홀리데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저는 그날 인권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집안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서울대법대가 대한민국 최고학교 최고학과라더군요.

그날부터 제 목표는 서울대법대였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 가방을 들어주며, 심부름을 하며 공부를 배우고 공부를 밤새도록 하기시작했습니다.

그해 겨울은 정말 따뜻했습니다.

50일 가량을 정말 하루 평균 30분 자는 스피릿으로 공부만했습니다.

고등학교 배치고사 저는 난생 처음 전교1등을 하였던 것입니다.



재수

재수의 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Pride&Prejudice(오만과 편견)이었습니다.

학원에 입학한 날 아이들은 패배감에 젖어있었습니다.

아이들과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저는 달랐습니다.

아이들의 수능 점수는 그 때 제 기준에서 봤을 때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아이들은 수능에서 실패했지만 저는 수능에서는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날부터 저 마음 속에는 자만심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안하문인의 건방진 재수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아이러니컬하게 모의고사 498점이 연달아 나오고 만점도 맞았습니다.

저는 학원내에서 아니 대전내에서 엄청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여자애들이 저를 동경의 시선으로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성에 눈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라고 할 수 없지만 제가 정말 진심으로 미치도록 제 자신보다 사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위해 공부를 손에 놓았습니다. 그 여인과 옆에 있기 위해서...



그 이외의 여러 재수생활의 안좋은 모습들은 제 글을 참고해보세요.



수능 성적표를 받은 그 순간 전 자살충동에 휩싸였습니다.

온갖 회한들이 밀려오고 부끄러움과 수치심, 자괴감 등등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고싶지 않아 부모님께는 성적표를 잃어버렸다고 하고 잘 나왔다고 속였습니다.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들이 그토록 원하던 서울대를 간다는 사실때문에...

저는 혼자 끙끙 앓았습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제작년 겨울을 보냈습니다.

혼자 마음아파하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그러다 제 안에 꿈틀대던 날개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저는 싸이렌 소리를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날개짓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서 이 초심을 잊지 않고자 공신 사이트 들어가 제 실패 수기를 작성하고

전국 60만 수험생에게 약속했던 것입니다.'내년'엔 꼭 돌아오겠노라고....



09수능 이후~현재

수능보고 와서 저를 기다리는 엄마에게 달려가 확 끌어안겼습니다. 펑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엄마는 그 때 제가 또 망한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오고 방문을 잠그고 인터넷을 켜서 채점을 시작했습니다.

역시 제 예상대로 저는 수능을 잘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제 꿈이 눈 앞에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확실히 경찰대와 육사는 합격이 100%라고 확신했습니다.

채점하고나서 부모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부모님께 안기고 사랑한다고 백 번 넘게 얘기했어요.(징그럽죠?ㅋㅋㅋ)



수능 성적표 받던 날 햇살은 정말 눈이 부셨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햇살보다도 따스하고

아름다운 햇빛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육사 합격했다고 연락이 오고

그 다음 주에는 충남경찰서에 전화해보니 충남 지방 경찰청장이 직접 전화를 바꾸어서 합격축하한다고

전해주시더라고요.

문제는 서울대학교였습니다.

12월 29일 인터넷에 구본석-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인문계열 1차 합격이라는 문구가 뜨더군요.

그 날 정말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3시간 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다시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2년전에도 같은 상황에 직면해있었고 그 때도 실패를 겪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다음날 부터 다시 미친듯이 초열공 모드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서 논술 면접을 보고 온 이후

1월 30일 저는 드디어 해낸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인문계열 최종합격"



4월 어느날 저는 중전(중앙전산원)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이었어요.엄마한테 전화가 온 것인데 서형일 공신님이

저한테 전화를 걸었다는 군요.그래서 저는 그 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었더니

저보고 어떻게 됐냐고 묻더군요.

저는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형일이 형이 제가 작년에 쓴 실패 수기를

보시고 결과가 궁금해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약속을 이루었고 드디어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삼수

3월

3월 2일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개학하는 날, 그 날 저도 공부하러 도서관에 갔습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공부를 시작해서 그런지 정말 공부가 안되었어요.

한참동안 있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엄청 비참해졌습니다.

암울 그자체....

하지만 의욕은 워낙 앞선 터라 3월은 정말 오기로 근근히 버텼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실패의 경험이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4월

-4월은 잔인하다-T.S.Eliet



이제는 그 스피릿도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점점 저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회귀해가고 있었습니다.

삼수생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자 다시 예전 재수생때처럼 나태의 늪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6시 기상을 목표로 했었으나 점차 7시, 8시,10시,나중에는 오후 1시 이렇게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늦게 일어나다보니 모든 공부계획이 다 흩뜨러져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그 중압감으로 인해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일어나면 그냥 집에서 공부해야겠다고 자기 정당화를 시작하고 결국 하루를 날려먹게 되는 날이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벌레같은 4월을 보냈습니다.

자기 패배감과 나태함, 자기 합리화,회한,자괴감의 연속이 4월을 장식하였습니다.



5월

-生卽必死 死卽必生-李舜臣



5월이 되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이러다가 나는 다시 망한다. 나는 다시 망하면 죽는다.

저는 이 무렵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수를 망하는 그 순간 이 세상을 미련없이 떠나기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유서를 작성하고 나니 살고 싶은 충동이 마음 속에서 꿈틀대더군요.

전 대학생활을 누리고 싶었어요.샤 정문을 지나서 서울대의 아름다운 캠퍼스를 거닐고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하고 헌팅도 하고 클럽도 가고 싶고

여자친구도 만들어서 제 목숨을 다바쳐 사랑도 하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법정에 서서 정의를 수호하고 청중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모든 삶의 변혁을 꾀했습니다.

제가 평소 다니던 대학 도서관은 저희 집에서 조금 먼 산골짜기에 있는 대학교였어요.

마치 관악산에 서울대 있는 것처럼요.

제가 생각해낸 것은 바로 그 도서관 바로 옆에서 텐트치고 생활하는 거였어요.

정말 모두들 미쳤다고 했습니다. 정신 나갔냐고.

예, 전 그 당시 정신이 나가있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단순히 성공의 욕구가 아닌 생존본능.

그 때 부터 저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6시가 되면 청소 아저씨가 청소하러 오시기 때문에 저절로 깨어나게 됩니다.

그럼 텐트를 걷습니다.그리고는 아침을 먹습니다.

문제는 주변에 아침을 하는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편의점 음식 먹기도 그렇고.그래서 직접 집에서 가스 버너를 가져와

냄비로 라면을 끓여먹었습니다. 일주일치 라면을 미리 사갔던 게지요.

정말 눈물의 라면이었습니다. 그렇게 라면을 먹다보면 엄청 맛있다가도 내가 이렇게까지 사는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해집니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머리를 대충 감고 세수를 하고 대략 7시.

공부를 시작합니다. 12시 반이 점심시간이었으니 그 때까지 단 한번의 미동도 없이

공부만 파고 들었습니다. 단 하나의 잡념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물론 가족과도 만나지 않은 상태였는데 관심 가질 대상조차도 없었습니다.

TV는 물론 인터넷도 사용하지 않으니 바깥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하루 24시간 단 2마디의 말만 한 저였습니다.

점심,저녁 때 "식권주세요." 이 말한마디요.

완전 관심 대상은 저밖에 없었으니 공부에만 초집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따사로운 5월의 봄은 지나갔습니다.



6월



6월에 접어들자 마자 6월 모의평가를 쳤습니다.

엄청 어려웠던 시험으로 기억되던 모의평가.7차 교육과정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린 그 시험.

전 490대를 찍었습니다. 그 어렵다는 수학도 100점 만점 맞고 다시 옛날의 영광을 되찾았습니다.

모의 평가를 본 후 자축하는 기념으로 혼자서 몰래 서울대 구경을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 날은 마침 촛불시위로 인한 동맹휴학날이었고, 캠퍼스는 한산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했던 캠퍼스 구경과 또다른 풍경의 캠퍼스를 구경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대학생으로서 시위를 참가하지 못한 것에 심각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청에 갔다와 대대적인 촛불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대학교가 너무나 가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숙박(?)을 3일 주기로 했는데 이제는 일주일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일요일 저녁에 1주일 생활비를 받아들고 토요일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대학교 도서관에서

숙박을 하면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까지 공부하고 집에 들어가 일요일 점심까지 푹쉬었습니다.

저만의 휴가였던 거죠.

전 그날만을 위해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7월

...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百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

-유치환,[생명의 서]



7월은 본격적으로 시험공부체제에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8월에 육사와 경찰대 시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3 수능 한달 남겨 놓은 수험생처럼 완전 시험체제에 딱맞추어서 공부했습니다.

시험이라는 부담감은 절 끊임없이 자극 시켰고 저는 미친듯이 달려나갔습니다.

수험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더위와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고3의 여름을 저는 3번째 맞는 입장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루 18시간 공부를 강행했던 제 정신이 아닌 저로서는 더위가 오히려 저를 공부하도록 자극했습니다.

이희승의 [딸깍발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요놈,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어디 내 년 봄에 두고 보자.”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더위가 저를 제압하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심장 속에서 뜨거운 피가 분출되었습니다.

몸이 열기로 뒤덥히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그 순간, 저는 쾌락을 느낍니다.(참고로 전 변태가 아니에요ㅠㅠ)

극한의 상황을 견뎌내가는 제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거죠.

더우면 더울수록 저를 더욱더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아가고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 공부하던 저는

실존을 찾는 사막의 구도자같은 성취감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8월



본격적인 시험 시즌이었습니다.

8월 첫째 주, 육군사관학교 시험.

드디어 정말 오랜만에 실전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험감독은 확실히 군인들이라 그런지 수능보다 더욱더 철저했습니다.

1교시 언어

2교시 영어

3교시 수학

내리 다 맞았을 것 같은 예감으로 시험을 치렀습니다.

집에 와봐서 채점을 해보니 언어에서 하나 미스...

아쉬웠습니다.채점을 한 순간 전 육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사를 너무 잘 본 전 자만심이 다시 생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2주 후에 무시무시한 경찰대 시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2주 전 정말 제 공부의 극한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20시간 공부, 잠은 3시간...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실제로 구토까지 하였습니다. 공부하다가 갑자기 구토를 하는데

초록색 위액이 나오는 것이었요. 갑자기 그 순간 코피도 벌컥벌컥 쏟고...

전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여기서 내가 죽는 구나.하지만 행복하다.이렇게 죽을 수 있어서.

난 내 인생에 최선을 다했고 부끄럽지 않다. 죽어서도 정말 후회는 없으리라.



그러나 전 죽지않고 경찰대 시험을 치루었습니다.

역시 1교시 언어

2교시 영어

3교시 수학

언어시험 보고 나서 쉬는 시간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행복해본 적은 처음입니다.

갑자기 모든 하나하나가 다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울고 나니 카타르시스를 느껴 영어와 수학을 대박을 쳤습니다.

집에 와서 채점해보니 언어와 영어는 모두 100점 만점 수학은 80점대.

커트라인을 보니 238점. 오르비사이트나 주변 입시 사이트를 통해 알아보니

전 거의 수석권에 수렴한 점수였습니다. 제가 아는 경찰대 선배가 있는데 그 형말로는 교수한테 욕만 안하면

무조건 합격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드디어 엄청난 쾌거를 올린 것입니다.

2주후 역시 저는 경찰대학교 1차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있었습니다.



9월



9월 초반에는 다시 한 번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정말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마음이 너무 편해져버린 것입니다.

슬슬 마음 속에서도 경찰대가서 앞날이 보장되는 경찰이 될까라는 생각을 시작하였고

주변에서도 경찰대 합격이 거의 확실시되니까 저에게 막 깍듯이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연락 두절되었던 친구들도 어떻게 알았는지 다 연락이 오고

부모님 친지들은 집에 거의 매일 먹을 것 같은 것을 가져다 주시고

저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9월에 육사랑 경찰대 2차 시험이 연달아 있었는데

그 시험 보는 데만 해도 1주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러다 경찰대에서 어떤 아이와 친해지게 됬는데 그 애도 저랑 같은 곳에서 공부하고 있더군요.

그 아이와 다시 합심하여 숙박체제를 더욱 강화하기로 하였습니다.

슬슬 날도 추워져 텐트는 무리였고 이제는 대학교 복도에 있는 소파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그 소파에서 이불깔고 자는 것입니다.처음에는 엄청 쪽팔렸습니다.

하지만 둘이 같이 하다보니 점점 철면피가 되어버렸고

우리 둘은 다시 완전 미친듯이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선의의 경쟁자로서 서로에게 절대 너그럽지 않은 채찍질을 가하였습니다.

그 때는 정말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10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수험생활 중에서 가장 빡센 한달을 보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서로가 번갈아 라면을 끓여주고 같이 눈물의 라면을 끌여먹고

공부할 때 졸면 따끔히(?) 깨우고 점심 저녁먹는 것도 절대 30분을 넘기지 않고

새벽 2시 넘게까지 서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 일어나지 않고 공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남부럽지 않은 한 달을 보냈습니다.

이 때에는 애들이 보통 문제풀이를 많이 하는데 저희들은 끝까지 개념공부를 놓지 않고 기출문제만을 풀고

또 분석하고 하는 등의 대인배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11월



슬슬 수능 한파가 시작되고 우리의 숙박도

드디어 철수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숙박 마지막날 우리는 남들이 보든 말든 우리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여러 곳곳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온갖 포즈도 잡으며 사진찍고 그 후에 마지막날의 딥토킹을 하였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의 인생을 감싸주는 그런 대화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수능 전날까지 단 한번의 흐트러짐 없이 우직하게 공부를 하였습니다.



수능 전날 방안에 혼자 있고 거기서 눈물을 혼자 펑펑 쏟았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전 수능이 망해도 좋다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전 결과보다 과정인 중요하다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수 1년이라는 과정은 그 이후의 어떠한 결과보다도 제 인생을 값지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미래의 배우자가 될 그녀에게, 제 자식들, 손자들에게

단 하나의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마치면서

제 성공수기를 넘어 인생이야기를 담으려고 하다보니 두서가 없었네요.

여러분, 여러분도 진정으로 성공하고 싶으시면 지금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나라고 자문해보세요.

단 10%라도 그렇지 않다면 항상 실패의 가능성은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자기 자신에게 100% 최선을 다한 순간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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